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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및 복지정보

펄벅도 감탄한 아름다운 음식 ‘구절판’ … 밀전병 쌈요리

작성자
최은미
등록일자
2016년 3월 2일 0시 0분 0초
조회
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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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판에는 동물성 식품과 식물성의 비율이 2대 8로 적절하고 하루 5대 영양소가 고루 담겨졌다.

나라마다 길수(吉數)라는 숫자에 좋은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가 존재한다. 반대로 흉한 숫자라고 기피하는 경향도 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예수가 천지를 창조하고 7일 뒤에 안식했다며 숫자 7을 선호한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숫자 4가 죽을 사(死)와 연상된다며 싫어한다. 한국인들은 예부터 숫자 9(구, 九)를 좋아했다. 풍요와 모든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구족’(九足)은 모든 백성, ‘구중천’(九重天)은 우주를 뜻한다.


숫자 9가 들어간 음식인 ‘구절판’(九折坂)에는 모든 음식을 넣었다는 의미가 담겼다. 구절판 팔각형 모양의 찬합 가운데 둥근 칸에는 밀전병이 들어간다. 그 주변 여덟 칸에 각기 다른 음식이 넣어진다. 밀전병 한 장에 고기나 채소 서너 가지를 넣어 겨자장이나 초장을 찍어 먹는다. 구절판의 재료마다 색이 화려하고 맛이 산뜻해 교자상이나 주안상의 전채요리로 적절하다.


과거 구절판에는 옻칠을 하고 자개를 박아 문양이 아름다운 찬합을 사용했다. 최근에는 도자기, 유리, 플라스틱 등을 이용해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구절판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 간다. 한강 유역의 고구려 요새였던 서울 아차산 일대 15개 요새 각각의 보루에서 구절판의 일종인 오절판의 원형이 발견됐다. 이를 통해 구절판의 연원은 고구려 시절로 추측한다. 고구려인들은 한 곳에 정착하기보다 여기저기 이동해 사는 습성 때문에 간편하면서도 여러 음식을 담는 구절판을 애용했다.


구절판의 조리법은 1930년대 이후 방신영이 쓴 ‘조선요리제법’, 홍선표의 ‘조선요리학’ 등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됐다. 이전까지 뚜렷한 역사적 기록이 없다며 구절판을 일제강점기 이후 요리로 인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구절판 용기는 간단히 음식을 담아 두기 위한 반찬통이라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일제강점기 구절판은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아름다운 칠기구절판 그릇에 담긴 음식은 고위관리나 상류층을 중심으로 연회 등에서 즐겨 먹었다. 신선로와 함께 한국의 잔치음식으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구절판은 심미적으로도 뛰어나다. 소설 ‘대지’로 유명한 미국 작가 펄 벅(Pearl Buck)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구절판을 보고 “나는 이 작품을 파괴하고 싶지 않다”며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칠흑 상자 뚜껑과 대조적으로 아홉 칸 빨간 틀 속에 원색의 식품이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 보고 감탄했다.


정혜경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영양학적으로 동물성 식품과 식물성 식품의 비율이 2대 8 정도일 때 궁합이 맞는다고 평가한다”며 “구절판은 두 식품이 적절하게 들어가 영양 균형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구절판에는 소고기·계란 등 단백질 성분과 다양한 채소류를 통한 비타민·무기질, 밀전병의 당질 성분 등 하루 5대 영양소가 고루 담겼다”고 덧붙였다.


구절판은 비싼 재료가 들어가지 않으며 정성만 있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다. 구절판 그릇이 없다면 무늬 없는 큰 접시에 밀전병을 두고 가장자리에 찬을 색에 맞춰 담아도 좋다. 일반적으로 소고기, 표고버섯, 연근, 당근, 오이, 숙주, 계란, 목이버섯 등이 구절판 요리 재료로 사용된다.


밀전병은 두꺼울수록 밀가루맛이 강해져 조리할 때 주의해야 한다. 너무 얇으면 만들기 어렵다. 밀가루 한 컵에 소금을 약간 넣고 물을 조금씩 부으면서 고루 풀어 반죽을 만든다. 일부에서는 밀가루 반죽에 달걀, 녹말, 찹쌀가루 등을 섞기도 한다.


부칠 때는 온도가 일정한 전기 프라이팬이 편하다. 잘 달군 팬에 솜이나 종이에 기름을 흠뻑 묻혀서 팬을 살짝 닦아 낸다. 기름이 흥건하면 음식에 기름맛도 배어 안 좋고 울퉁불퉁해져 지저분해진다. 밀전병을 부칠 때는 얇고 동그란 잎파리 모양의 한국식 숟가락을 이용해 얇게 펴야 한다.


구절판은 한국 고유의 오방색(五方色)인 노란색, 붉은색, 녹색, 흰색, 검정색 등을 나타낸다. 재료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향기가 강한 풋고추, 피망, 셀러리, 우엉 등은 피하는 게 좋다. 해물 중에는 새우, 게, 오징어 등을 데쳐서 넣으면 색도 곱고 맛도 어울린다. 소고기는 간장(진간장)으로 양념하고 나머지 채소는 소금으로 간을 맞춰 고유의 색과 향을 잘 살리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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